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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타임즈] 로버트 하디(Robert A. Hardie), 그 믿음 행적의 근원을 찾아서
2016.06.24 10:36:53

이덕주 교수(감신대/한국교회사)
2016년 05월 25일 (수) 16:24:18기독교타임즈 webmaster@kmctimes.com

  
▲ 세네카 하디 생가.

지난 5월 3일부터 3박 4일 일정으로 ‘한국 부흥운동의 아버지’ 로버트 하디의 캐나다 고향을 다녀왔다. 이번 여행은 대한항공 대구지점장 강사겸 씨(연동교회 집사)가 주선하여 이루어졌다. 강사겸 집사는 토론토 지점장으로 근무하던 시절, “스코필드와 매켄지, 홀, 게일, 에비슨, 펜윅, 하디, 그리어슨, 푸트, 매컬리 등 2백여 명에 가까운 캐나다 선교사들이 한국교회 부흥과 민족 독립운동을 위해 헌신, 희생하였는데 그런 선교사들의 고향을 방문하여 보은(報恩)을 표하는 것도 필요하지 않겠는가?” 해서 순례 프로그램을 처음 구상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번에 대한항공과 캐나다 관광청의 후원을 얻어 우선 장로교 선교사 게일과 감리교 선교사 하디의 고향을 방문하는 시범적 여행 프로그램을 만들어 목회자와 평신도, 교계언론사 및 성지순례 전문여행사 대표들로 여행단을 꾸렸는데 거기에 일산광림교회의 박동찬 목사와 내가 초청을 받았다. 3년 전, ‘하디영적각성 1백주년 기념성회’에 맞추어 하디를 간략하게 소개한 「로버트 하디 불꽃의 사람」을 펴냈지만 내용이 부족해서 미안한 마음이 떠나지 않았던 나로서는 그의 고향을 방문하게 된 것이 큰 은총이었다.

  
▲ 하디 부모의 묘소. 좌로부터 강사겸 집사, 이덕주 교수, 유영식 교수, 박동찬 목사.

 여행 일정은 도착 첫 날 토론토 서머나장로교회 구내에 위치한 <내한 캐나다선교사 전시관>(최선주 장로가 개인적으로 설립한 자료관으로 캐나다선교사 182명에 관한 사진과 유물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과 캐나다 선교사들이 다녔던 토론토대학과 토론토시내 기독교관련 유적지를 방문하였고 둘째 날 토론토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하디와 게일의 고향 생가와 교회를 방문했다. 이번 답사여행은 20년 넘게 캐나다 선교사 연구로 이 분야 최고 학자로 인정받는 요크대학의 유영식 교수가 안내해 주었다. 그리고 여행 마지막 셋째 날에는 캐나다 관광의 필수 코스인 나이아가라폭포를 구경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나는 여행단에 양해를 구하고 별도로 하디의 고향을 다시 한 번 방문하여 좀 더 자료를 찾아보기로 했다. 캐나다지방 감리사 석동기 목사와 내 제자 헤리티지교회의 김대완 목사, 토론토 <크리스찬저널> 발행인 서준용 장로, 그리고 윤춘병 감독님의 셋째 딸 윤성실 권사 등이 동행해서 통역과 안내로 도움을 주었다. 그렇게 해서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동안 궁금했던 하디 관련 자료와 정보를 많이 얻었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하디는 1903년 원산 부흥운동과 1907년 평양 부흥운동의 주역으로 ‘한국 부흥운동의 아버지’란 칭호를 얻었다. 그런데 사실 그는 부흥운동가로서보다 신학자와 의료선교사, 문서선교사로서 더 많은 업적을 남겼다. 하디는 평양 부흥운동이 일어난 1907년부터 17년간 서울 감리교협성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교)와 피어선기념성경학원 교수 및 교장으로 사역하면서 60여 권의 저서와 170여 편의 논문을 썼다. 또한 목회자로서도 서울의 종교교회와 자교교회, 수표교교회, 광희문교회, 석교교회, 그리고 강원도의 춘천중앙교회와 강릉중앙교회, 양양교회, 삼척교회, 속초교회, 철원제일교회 등을 설립하거나 담임했다. 그리고 1924년 신학교 교장직을 내놓고 조선예수교서회(현, 대한기독교서회) 총무로 옮긴 후 1935년 정년 은퇴하기까지 <기독신보> 사장으로 일했다. 하디는 은퇴 후 다섯째 딸 가족이 살고 있던 미국 미주리주 랜싱에 거주하다가 1949년 6월 별세하였다.

  
▲ 하디의 세네카 고향교회.

 여러모로 한국 감리교회의 ‘은인’이 된 하디의 고향을 찾아가는 길은 그리 험하지 않았다. 자동차로 토론토에서 서쪽으로 미시소가를 지나 해밀턴 외곽에서 6번 하이웨이를 타고 남쪽으로 10킬로미터 정도 달리면 동서로 가로지르는 유니티사이드 로드(unity side rd.)를 만나는데 바로 두 길이 교차하는 네거리의 동북부 모서리에 하디의 생가가 남아 있다. 주소는 온타리오주 칼레도니아카운티(Caledonia county) 식스하이웨이(six highway) 770번지다. 그 집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유니티사이드 로드 좌우편에 농장과 집들이 띄엄띄엄 흩어져 있는데 농사를 주로 짓는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다. 여기가 바로 하디의 고향인 세네카(Seneca) 마을이다. 이 지역은 본래 토착 인디언들이 살던 곳이었는데 1830년대부터 유럽, 특히 영국에서 건너온 이주민들이 농사를 짓고 살았던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다. 유영식 교수의 고증에 의해 하디의 생가로 알려진 2층짜리 붉은 벽돌 건물은 깨끗한 형태로 잘 보존되어 있었는데 집 주인을 만나지 못해 그 집의 내력을 듣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바로 이곳 세네카 마을에서 로버트 하디는 독실한 감리교도 제임스(James Hardie)와 아비게일(Abigail) 사이에 맏아들로 1865년 6월 11일 출생했다. 그의 부모가 언제부터 이곳 세네카에 들어와 살게 되었는지 분명치 않지만 세네카의 초기 유럽이주민 가족에 속한 것은 분명하다. 이는 세네카에 남아 있는 그의 고향교회 역사와 묘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하디의 고향교회는 그의 생가에서 서쪽으로 유니티사이드 로드를 따라 10분 정도 걸어가면 길가에 남아 있다. 붉은 벽돌의 아담한 고딕양식 건물인데 예배당 출입문 위쪽에 간판처럼 벽돌 위에 ‘Wesleyan Methodist Unity Church 1864’라 새겨져 있다. 이 건물이 1864년 세워졌다는 것과 이 교회를 세운 이들이 (미국이 아닌) 영국에서 건너온 감리교도들인 것을 알 수 있다(미국 감리교회는 Methodist Episcopal이란 명칭을 사용한다).

 칼레도니아 지역 도서관에서 찾은 자료를 통해 이미 1840년 칼레도니아 인근 글랜포드구역회 소속으로 세네카에 감리교회가 설립되어 집회를 시작했음을 알 수 있었다. 세네카 감리교인들은 처음 마을 초등학교 건물에서 집회를 하다가 1850년대 이주민들이 늘어나고 특히 1862년 1월, 6주간에 걸친 천막집회에서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 80명이 넘는 새 신자가 생겼다. 바로 이런 천막집회 부흥운동의 결실로 세네카 예배당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새 예배당을 건축한 이듬해 로버트 하디가 출생하였던 것이고 그가 태어날 무렵 아버지는 세네카감리교회의 6인 속장 중 1인이었다. 이처럼 하디는 전통 깊은 ‘영국 감리교도’ 집안에서 출생해서 부모와 함께 세네카 예배당에 출석하며 신앙을 길렀다.

 세네카 감리교회는 1864년 예배당 건립 이후에도 계속 부흥하여 집회공간이 비좁았다. 그래서 1878년 세네카 교인들은 큰 결단을 내렸다. 마을에서 남쪽으로 5킬로미터 떨어진 칼레도니아 도심지, 그랜드 강변 언덕에 ‘칼레도니아감리교회’(Caledonia Methodist Church)란 명칭의 새 예배당을 짓고 그리로 출석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1878년 이후 세네카 회당은 더 이상 교회로 사용되지 않았지만 교회 주변으로 세네카 교인들의 무덤이 계속 들어서면서 지금은 ‘세네카 유니티처치 공원묘지’(Seneca unity Church Cemetery)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렇게 조성된 교회 묘지에 하디 부모와 동생의 묘소가 있다. 예배당 건물 동편에 바로 붙어 있는 하디 가족 묘소엔 후대(1980년대로 추청)에 다시 세운 것으로 보이는 오벨리스크 양식의 대리석 묘비에 아버지 제임스가 “50년 10개월 15일을 살고 1875년 5월 28일 별세”하였고, 어머니 아비게일은 “37년 18일을 살고 1875년 1월 23일 별세”하였으며 동생 토머스(Thomas)는 “20년 6개월 2일을 살고 1888년 7월 5일 별세”한 것으로 새겨져 있었다. 그렇다면 로버트 하디는 열 살 때 네 달 간격으로 부모를 모두 잃었고 한국에 선교사로 나오기 1년 전에 동생이 죽었다는 말이다. 그는 ‘천애 고아’로 자라나 동생마저 잃는 슬픔을 겪은 후 한국에 선교사로 나온 것이다. 

  
▲ 하디 부인 켈리의 부모 묘비.

 그렇게 하디 부모와 동생의 묘비를 둘러본 후 하디가 어려서 뛰어 놀았을 교회 언덕을 둘러보던 중, 하디 부모의 묘소에서 멀지않은 곳에서 하디 부인 마가렛 켈리(Margaret Kelly)의 부모 묘소가 눈에 띄었다. 그것은 예상치 못했던 발견이었다. 켈리 부모의 묘비는 처음 세워졌던 당시 모습 그대로였는데 긴 세월에 글자가 마모되어 읽기 어려웠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아버지 존(John)은 “37년 5개월 12일을 살고 1877년 7월 29일 별세”, 어머니 엘리자벳(Elizabeth)은 “51년 10일을 살고 1891년 10월 1일 별세”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켈리의 아버지는 하디의 부모가 죽은 2년 후 별세했고 어머니는 좀 더 오래 살다가 딸과 사위가 한국에 선교사로 나간 1년 후 별세한 셈이다. 결국 하디 부부는 고향 친구로서 모두 어려서 부모 혹은 아버지를 여의고 삼촌 혹은 홀어미니 밑에서 양육을 받고 선교사가 되었다. 이 대목에서 로버트 하디가 서울에서 간행되던 선교사 잡지 <The Korea Mission Field>에 1914년 발표한 “나는 왜 선교사가 되었는가?”라는 글이 떠올랐다. 하디는 이 글에서 자신이 선교를 지원하게 된 동기를 1866년 12월, 고향친구 켈리와 약혼한 것으로부터 설명하였다.

 “약혼식을 치른 직후 나와 아내는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장래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모두 어렸을 때 부모님 혹은 아버지를 잃었지만 그들로부터 좋은 신앙 교육을 받았던 터라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유익한 존재로 살아가자고 결심하였다. 우리는 기독교인 의사로 산다면 좀 더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기회가 많을 것이라는데 의견을 모았고, 그 날 밤 나는 의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하였다.”

 비록 일찍 돌아가셨지만 어린 시절부터 자주 들었던 부모의 “세상에 가장 유익한 존재가 되라.”(be the most useful to the world)는 말씀이 하디의 인생에 나침반이 되었다. 그 무렵 하디는 칼레도니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향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켈리와 결혼하면서 ‘보다 세상에 유익한 존재’가 되는 길을 찾던 중 질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는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해서 하디는 교사직을 사임하고 곧바로 토론토의과대학에 입학하였는데 1학년 때 학교를 방문한 포오맨 목사로부터 해외선교에 대한 강연을 듣고 “본국에서 의사를 할 수도 있지만 의사가 없어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해외 선교지로 나가는 것이 보다 유익한 존재가 되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해외선교를 결심했다.

 그리고 하디는 졸업반 때 선교지를 놓고 기도하던 중 아시아에서 제일 늦게 문을 연 한국에 의사가 절대 필요하다는 학교 선배 게일의 편지를 읽고 한국 선교를 지원하였다. 인도나 중국, 일본처럼 선교사들이 이미 많이 들어가 사역하고 있는 ‘안정적인’ 나라보다는 아직 선교사들이 없는 한국을 택한 것도 ‘보다 유익한 존재’가 되기 위한 결단이었다. 이처럼 교사에서 의사로, 의사에서 해외선교사로, 해외 선교 중에도 한국을 선교지로 택하게 되는 과정에서 하디의 선택과 판단의 기준은 어려서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세상에 가장 유익한 존재가 돼라”는 교훈이었다. 하디 부인 켈리도 어려서부터 부모로부터 그와 비슷한 교훈을 받았기에 남편의 이런 결심과 선택에 전적으로 동의하여 선교에 동행할 수 있었다. 이처럼 하디 부부의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선교사역의 기반과 배경에 부모의 ‘아름다운’ 교훈이 작용했다는 점을 생각하니 이들 부부의 부모 묘비가 한층 따뜻하게 느껴졌다. 또한 하디 부부가 어려서 사별한 부모의 묘소를 보노라니 서울 양화진에 있는 하디 부부의 어린 두 딸 묘소가 떠올랐다.

  
▲ 칼레도니아 그레이스연합교회.

 이렇듯 감동의 세네카 고향교회 방문을 마치고 칼레도니아 도심지로 가서 하디가 다녔던 칼레도니아고등학교 터와 하디 가족이 출석하였던 칼레도니아교회 터, 그리고 세네카감리교회와 칼레도니아감리교회의 역사와 전통을 계승한 오늘의 그레이스연합교회(Grace United Church)를 둘러본 후 토론토로 다시 나와 하디가 4년간 학창 생활을 했던 토론토의과대학과 그 시기 출석했던 ‘세인트루크교회'(St. Luke Church)’, 그리고 하디 부부가 한국에 선교사로 나오기 직전까지 살았던 토론토 시내 셋집 건물을 둘러보고 서둘러 귀국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짧았지만 감동과 감격이 충만했고 그래서 여운이 오래가는 답사여행이었다.

  
▲ 하디가 토론토의과대학 수학시절 출석했던 세인트앤드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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