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sionary Story
Missionary Story
“한국 성결교회 정착에 기여”
성결교 선교 개척
킬보른 선교사 가족은 동양선교회 선교사로 사역하며 한국 성결교회 정착에 기여했다. 어네스트 킬보른 선교사는 1865년 3월 13일 캐나다에서 독실한 감리교도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전신기술에 뛰어나 10대 중반부터 독립된 생활을 시작했으며, 20대에는 세계 여러 곳을 여행했다. 킬보른은 한때 믿음의 길을 떠났으나 20대 후반 찰스 카우만의 인도로 신앙을 회복했다.
킬보른은 1894년 시카고에서 열린 무디의 선교대회에서 선교사의 꿈을 품었다. 그는 무디성서학원을 졸업하고 이어서 신학을 공부를 한 후 1902년에 목사안수를 받았다. 킬보른은 그를 다시 믿음의 길로 인도한 카우만의 초청으로 1902년부터 일본에서 동양선교회의 선교사역을 시작했다.
킬보른 선교사가 한국에 처음 온 것은 1907년 5월이었다. 서울 종로 염곡동에 한국 최초의 성결교회(현 중앙교회)를 설립하기 위해 한국에 온 킬보른 선교사는 2주간에 걸쳐 전국 순회 전도활동을 펼쳤다. 1921년부터는 동양선교회 한국 책임자가 되어 한국에 상주하며 본격적인 선교사역을 시작했다. 이때 킬보른 선교사는 3.1운동 이후 침체되었던 성결신앙 대부흥 운동을 이끌었고, 경성성서학원 원장으로 취임하여 규모를 확장했다. 특히 동양선교회의 기관지인 <활천>을 창간하여 신학적 기틀을 마련하는 등 성결교 선교 및 신학정립에 기여했다. 킬보른 선교사는 1924년 동양선교회 총재로 취임하여 미국으로 돌아감으로써 한국에서의 선교활동을 17년 만에 마감했다. 그는 1928년 4월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에서 별세했다.
3대에 걸친 선교사역
킬보른 선교사의 한국 선교는 그의 후손들로 이어졌다. 외아들 로슨 킬보른은 1923년부터 동양선교회 선교사로 활동을 시작해 경성성서학원 교수, 동양선교회 부총재 등을 역임했다. 그러나 그 역시 1941년 일제의 강제추방에 의해 한국을 떠났다가 광복 직후인 1949년 다시 한국선교사로 들어와 선교사의 삶을 살았다.
킬보른 가족의 한국 선교는 3대째 계속되었다. 로슨 킬보른 선교사의 세 자녀 모두 동양선교회의 선교사가 되었으며, 이중 장남 에드윈과 차남 엘머는 1949년부터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다. 특히 에드윈은 서울신학대 교수 및 제2대 학장, 동양선교회 부총재 등으로 1973년까지 한국에서 활동했으며, 엘머는 서울에서 동양선교회 구제사역자로 활동하다가 1985년 인도선교를 위해 우리나라를 떠났다. 양화진에는 1950년 5월6일 태어난 3대 선교사 에드윈 킬보른 선교사의 딸 캐슬린이 단 이틀 동안의 짧은 생을 마치고 잠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