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sionary Story
Missionary Story
“기독교 문명론(Christan Civilization)을 구현하였던 선구자”
선교 사역의 의의
프랭클린 올링거는 1888년 1월부터 1893년 9월까지 한국에서 선교사로 사역한 미국 북감리교 출신의 선교사다. 올링거 선교사는 한국으로 파송되기 전 중국에서 16년간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올링거가 한국에서 첫 사역을 시작할 당시 그의 나이는 42살이었다. 때문에 20대 청년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던 언더우드나 아펜젤러에게는 이미 중국과 일본에서 선교 활동을 한 그의 합류로 많은 조언과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다.
한국에서 그리 길지 않은 기간 동안 선교사로 활동하였으나 그의 사역은 한국 기독교는 물론 인쇄와 출판 및 교육 사업에서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그는 한국 선교 첫 해에 우리나라 최초의 인쇄소인 삼문활판소를 배제학당에 설립하였고, 현 대한기독교서회의 전신인 조선성교서회를 조직하여 초대 회장직을 맡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영문 잡지인 <The Korean Recorder> 역시 그에 의해 창간되었다. 그는 또한 한국인 최초로 목사가 된 김창식을 하인으로 데리고 있던 중 전도하여 아펜젤러 목사에게 세례를 받게 하였다.
올링거는 여러 전도 문서를 번역 출판하였을 뿐 아니라 그가 쓴 설교학과 목회학 저서들은 한국은 물론 중국과 일본에서도 신학교 교재로 채택되었다. 올링거 선교사는 그의 아내와 함께 초기 한국 감리교 찬송가의 상당수를 번역하여 보급하기도 하였다.
프랭클린 올링거는 후대의 기독교 역사학자들에 의해 미국 북감리교의 초기 선교 신학을 대변한 선교사로 19세기말의 선교 신학의 주요 흐름이었던 ‘기독교 문명론’(Christian civilization)을 한국과 중국과 일본의 선교 현장에서 구현하였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생애
올링거 선교사는 1845년 11월 29일 오하이오주 샌드스키 카운티에서 태어났다. 남북전쟁으로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올링거는 부친과 형이 남북전쟁에서 돌아 온 1865년 저먼 왈라스 대학에 입학했다. 저먼 왈라스 대학은 술,커피,담배 등을 금지하는 마을 헌법을 바탕으로 천년왕국론에 입각한 실험적인 공동체를 가졌던 교육도시였다. 대학을 졸업한 올링거는 미시간의 사기노와 베이시티 독일 감리교회 등에서 설교자로 1년간 사역한 뒤 펜실베니아 피츠버그의 독일감리교회에서 2년간 목회하였다.
진로를 놓고 기도하던 중 북감리교의 한 감리사의 조언에서 소명을 발견한 올링거는 1870년 가을 당시 중국 선교의 중심지였던 복건성의 수도 복주에 파송되었다. 복주에서 올링거 선교사는 한국과 일본에서 활동한 맥클레이 선교사를 만났다. 그는 중국에 파송된 그 다음해였던 1871년 볼드인 신학교를 조직하였고, 1874-5년에는 최초의 한문 신문인 <순산사자>를 발간하였다.
1876년에는 귀국하여 독일 감리교회 목사 존 슈바인푸르트의 딸 베르타와 결혼하였다. 올링거는 1881년 최초의 근대 학교인 복주 중서학원을 설립, 초대 교장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당시 중서학원의 설립은 선교사 사회에 큰 논란을 일으켰다. 300명의 학생 가운데 절반이 비기독교인이었던 이 학교가 논란에 휩싸이게 된 것은 비기독교인에게도 배움의 문을 열 것인지에 대한 견해 차이로 인한 선교사 사이의 갈등 때문이었다.
당시 많은 선교사들은 ‘삼자 정책’을 따르지 않은 올링거 선교사의 ‘신교육 운동’에 반대했다. 결국 이 논란으로 인해 올링거 선교사는 1887년 말, 아펜젤러의 요청으로 한국으로 파송되었다. 올링거 선교사는 파송 첫해에 인천에서 오두막 예배당인 인천내리교회를 세웠다. 1891년 1월에 올링거 선교사는 한국 최초로 서양식 교육을 받은 여자 의사 박에스더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1890년부터 1893년까지는 정동교회를 담임하며 복음을 전했다.
한국 선교 3년째가 되던 1890년, 올링거 선교사는 현 대한기독교서회의 전신인 조선성교서회를 언더우드 등과 함께 설립하고 초대 회장이 되었다. 1889년 2월부터 그는 스크랜튼 대부인이 자기 집에서 시작한 여성들의 모임을 이어받아 여성교회 담임목사가 되었고 1893년에는 당시 한반도의 주도적인 항구 가운데 하나였던 원산에서 의료선교사 맥길과 함께 기독교 서적을 팔며 병자도 고치는 사역을 감당했다.
그 해 5-6월에 올링거 선교사는 열 두 살과 아홉 살 난 아들과 딸을 편도선염으로 잃었다. 한국에서 죽은 최초의 서양 어린이들인 이들을 양화진에 묻은 올링거 선교사 부부는 1893년 9월에 한국에서의 사역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안식년을 마치자 올링거 선교사 부부는 1895년 다시 중국 선교사로 파송되어 1911년까지 복주에서 인쇄소와 대학을 중심으로 사역하였다. 그 이후 은퇴한 올링거 선교사는 미시간 앤 아버에서 1919년 사망하여 톨레도 우드론 공원묘지에 안장되었고, 올링거 부인은 1943년에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남편 곁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