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sionary Story
Missionary Story
“한국 군목 제도 창설 공로자”
한국 군목 제도 창설 공로자
윌리엄 얼 쇼(이후 얼 쇼로 칭함) 선교사는 우리나라 군목제도 창설에 기여했으며, 군 복음화의 초석을 닦았다. 얼 쇼는 1890년 미국 시카고에서 태어나 웨슬리안대학을 졸업한 후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유럽전선에서 군목으로 종군했으며, 전쟁이 끝난 후 미국 콜롬비아대학원에서 공부했다. 이후 그는 1921년 아내 아델린(1919년 결혼)과 함께 미국 감리교 선교사로 우리나라에 왔다.
그들은 일제 치하의 한국에서 감리회 평양선교부에 배속되어, 얼 쇼 선교사는 광성학교에서, 아내 아델린 선교사는 숭덕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했다. 얼 쇼 선교사는 평안도 지방은 물론 황해도와 만주에서도 선교활동을 펼쳤고, 평양에 요한학교를 설립하여 기독교 지도자 양성에도 힘을 썼다. 얼 쇼 선교사 부부는 약 20년 동안 선교사역을 감당했으나 일제의 강제 추방 조치로 인해 1941년 우리나라를 떠났다.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해방되자 얼 쇼 선교사는 한국 선교사를 자원하여 1947년 다시 들어왔다. 쇼 선교사는 1950년 한국전쟁 때 주한미군 군목으로 활동하면서 한국군에 군목제도를 창설하는데 기여했다. 1954년부터는 대전신학교(현 목원대) 교수로 재직하며 목회자를 양성하는데 전력하는 한편 미국의 독지가들이 후원한 자금으로 목회자들의 수련과 휴양공간인 목자관과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외아들 윌리엄 해밀턴 쇼를 기념하는 예배당을 학교 구내에 설립했다. 그는 1961년 40년에 걸친 선교사 사역을 마치고 은퇴하여 미국에서 여생을 살다가 1967년 별세했다.
얼 쇼 선교사 부부에게는 외아들이 있었는데, 바로 윌리엄 해밀턴 쇼(이후 해밀턴 쇼로 칭함)이다. 해밀턴 쇼는 1922년 평양에서 태어나, 군인 시절에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노르망디 싱륙작전에 참가했으며, 해방된 우리나라에 와 국군해안경비대 창설에 기여했다. 군 복무를 마친 후 해밀턴은 하버드대에서 공부하며 박사과정을 밟던 중,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자원입대하여 해군 장교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그는 맥아더 장군이 지휘한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했고, 이어 서울 녹번동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전사했다. 당시 그의 나이 28세였다. 그의 유해는 당시 한국에서 선교사로 일하고 있던 아버지 얼 쇼 선교사에 의해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해밀턴 쇼의 아내 주아니타(서화순)는 남편이 전사한 6년 후인 1956년 감리교 선교사로 한국에 와 10여 년 동안 이화여대에서 교수로 재직하였다.
양화진에는 윌리엄 쇼-아델린 쇼 선교사 부부와 한국전쟁 당시 전사한 외아들 해밀튼 쇼가 안장돼 있으며, 서울 녹번동에는 한국 해군이 세운 해밀튼 쇼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