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sionary Story
Missionary Story
“근대의학 발전에 공헌, 세브란스 병원 설립과 교육으로 한국을 섬긴 가족”
세브란스병원을 세우다
에비슨은 세브란스 병원과 의학교를 설립하고 성장시켜서 근대의학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는 캐나다 시골의 궁핍한 영국 이민자 가정 출신으로 스스로 학비를 벌어서 학업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어려운 환경에서도 특유의 성실함으로 토론토 의대를 졸업하였다. 그는 모교에서 외과 교수로 봉직하면서 토론토 시내에 개업해서 이름을 날렸다. 그러던 차에 에비슨은 조선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던 언더우드를 토론토로 초청하여 교회와 학교에서 강연하도록 하였다. 이 때, 언더우드는 ‘조선에 선교사로 오지 않겠느냐’고 권유하였고, 이미 선교사로 헌신하길 결심하였던 에비슨 부부는 자신들의 사역지가 조선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1893년 한국에 들어온 에비슨은 처음에는 제중원의 책임을 맡아서 환자들을 진료하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에비슨은 교단별로 산재해 있는 진료소들을 묶어서 규모가 있는 병원을 설립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그의 이러한 바람은 에비슨의 안식년 기간 중 ‘세브란스’라는 석유회사 사장과의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세브란스가 에비슨에게 1만 달러를 기부한 것이다. 그의 이름을 딴 세브란스 병원은 1904년 남대문 밖 복숭아골에 세워졌고, 세브란스가(家)의 계속된 기부를 통해 병원은 계속 증축될 수 있었다.
제중원 의학교 설립하고, 연희전문학교 교장으로 섬기다
에비슨은 한국의 위생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한국인 의사와 간호사의 양성이 필수적이라고 여겨서 1899년 제중원 의학교를 개설하였다. 이 학교는 처음에 지원자들이 별로 없고 가르칠만한 적당한 한글 교재가 없어서 애를 먹었다. 에비슨은 김필순과 함께 해부학 서적을 천신만고 끝에 번역하였지만 그것은 사고로 소실되고 말았다. 하지만 더 많은 교수들이 충원되면서 학교는 점차로 발전해 갔다. 이 중에는 한국인 교수 박서양도 있었는데, 박서양은 에비슨 선교사의 치료로 장티푸스의 죽을 고비를 넘긴 후 백정과 천민에게 복음을 전했던 백정 박성춘의 아들이기도 했다. 한편 에비슨은 병원장을 그만 두면서 다른 선교사들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한국인 오긍선이 자신의 후임이 되도록 하였다. 이것은 선교의 목적이 한국 사람들 스스로 모든 책임을 맡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데 있다는 평소의 소신을 실천한 것이다.
또한 에비슨은 언더우드의 뒤를 이어서 연희전문학교의 교장으로 1916년부터 18년을 일하기도 하였다. 그가 이렇게 당시 유력하던 선교 기관 두 곳의 대표로서 일할 수 있었던 것은 특유의 성실함과 겸손함, 균형감각 덕분이었다. 33세 때 한국에 들어온 에비슨은 42년 동안의 훌륭한 선교사역을 마감하고 1935년 은퇴 후 귀국했으며, 1956년 플로리다 주에서 96세의 나이로 별세 하였다.
1893년 부산에서 태어난 에비슨의 아들 더글라스는 아버지가 졸업한 캐나다 토론토 의대를 졸업하고, 1920년 북장로교 의료선교사로 내한하였다. 그는 선천 선교부, 서울 선교부, 세브란스 의전 소아과 교수 및 병원장으로 봉직하다가 태평양전쟁 직전에 캐나다로 돌아갔다. 1952년 캐나다 밴쿠버에서 별세하여 유언에 따라 양화진에 안장되었고, 그의 아내 캐서린도 1985년 87세로 별세한 후 양화진에 있는 남편 묘에 합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