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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처음 이야기

Missionary Story

선교사 소개

Anderson, Lillian E. B. (앤더슨)
출생
1892. 8. 미국
별세
1934. 11. 한국
한국활동기간
1917~1934
국적
미국
소속교단
장로교
묘비번호
F-39

선교사 이야기

‘예수 오실 때까지’ 묘비명 남기고


릴리언 앤더슨-남편과 함께 17년간 헌신 후 양화진 안장


릴리안 앤더슨 선교사는 1892년 8월 네브래스카 주 새드론(Shadron)의 퀘이커교도 가정에서 출생했으며, 캘리포니아에서 성장했다. 그녀는 옥시덴탈대학(Occidental College)을 졸업한 후 캘리포니아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릴리안은 어린 시절 영어를 배우기 위해 미국에 온 일본 청년들과 교유하며 동양선교의 꿈을 갖게 되었다.


릴리안은 옥시덴탈대학 재학시절 켈로그(H. W. Kellogg) 교수가 인도하는 성경공부모임에서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만났다. 릴리안은 캘리포니아대학원을 졸업한 후 미 북장로교 해외선교부에 일본선교사로 지원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달랐다. 한국 선교사로 결정된 앤더슨과 1917년 8월 결혼함으로써 한국 선교사로 오게 된 것이다.


릴리안은 남편 앤더슨 선교사와 함께 안동에서 1917년부터 1922년까지 헌신했다. 그녀는 안동여성성경학원을 설립하고 교장으로 봉사했다. 그곳에서 그녀는 한국인들에게 ‘절대 화내지 않는 부인’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릴리안 선교사는 1919년 얻은 첫 딸 도로시(Dorothy Eleanor)를 7개월 만에 잃었지만 다시 만날 것을 확신하며 슬퍼하지 않았다. 도로시는 안동 경안고등학교 교정에 묻혀 있다.


릴리안 선교사는 1922년 남편 앤더슨 선교사가 서울로 사역지를 옮기게 되자 함께 서울로 올라왔으며, 이후 수년간 여성선교사모임 회장과 정신여학교 성경교사로 일하는 등 한국에서 17년 동안 헌신했다. 릴리안 앤더슨 선교사는 1934년 11월 별세하여 양화진에 묻혔다.

 

앤더슨 선교사-한국교회 청년면려회 운동의 개척자


앤더슨(W. J. Anderson 안대선) 선교사는 1890년 미국에서 태어나 1917년 북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에 왔다. 그는 1917년부터 1922년까지 경상북도 안동선교부에서 북부 경북 지역 교회를 돌며 선교활동에 헌신했으며, 이후에는 일제의 추방으로 한국을 떠난 1942년까지 서울에서 활동했다.


앤더슨 선교사는 아내와 함께 안동을 중심으로 인근 농촌과 산촌을 방문하며 3.1운동의 실패로 실의에 빠져 있던 청년들에게 복음과 희망을 전했다. 그는 실의에 빠진 청년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청년면려회 운동을 주창하여 1921년 2월, 경북 안동교회에서 전국 최초로 청년면려회를 조직했다. 앤더슨 선교사의 지도 아래 안동에서 시작된 청년면려회는 오늘날 전국남선교회(장년전도회)로 발전했다. 청년면려회 운동은 앤더슨 선교사의 한국교회를 위한 헌신 중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앤더슨 선교사는 1922년 서울선교부로 사역지를 옮긴 이후에도 청년면려회 운동을 전국으로 확산시키는데 적극적으로 노력했으며, 1924부터 10년 동안 조선기독청년면려회 초대 총무로 활동했다. 앤더슨 선교사는 1934년부터 기독교서회에서 문서선교에 종사하다가 1942년 일제의 강제추방으로 한국 떠났다. 그는 1960년 미국에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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