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sionary Story
Missionary Story
뮬렌스테스는 덴마크 출신 전기통신 기술자로 우리나라에 최초로 전기통신을 소개했다. 그는 1885년 우리나라 최초의 전신선인 서로전선 건설 때 전선가설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고 구한말 전보기술자 양성에 힘썼다. 뮬렌스테스는 1855년 덴마크에서 아버지가 목사이자 마을 우체국장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1881년부터 덴마크 전신회사에서 기술자로 근무하다가 중국으로 건너가 청국 전보총국에 들어가 홍콩과 상해 등에서 일했다. 1885년 8월, 조선 최초의 전신선인 한양과 인천, 서울과 의주를 잇는 전선(서로전선) 가설을 청국 전보총국이 담당하게 되었을 때, 뮬렌스테스는 기술감독관 자격으로 조선에 들어와 전선가설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이후 뮬렌스테스는 한성전보총국의 기술자로 남아 남로전선 가설에 참여했으며, 1894년 청일전쟁 때 중국으로 돌아갔다.
청일전쟁이 끝난 후 뮬렌스테스는 조선정부가 전신기술자 양성을 위해 설립한 전무학당의 교사로 초빙되어 다시 조선에 들어와 학생들의 전신 관련 기술 지도를 담당했다. 이러한 그의 공을 인정한 조선정부는 1899년 12월, 참의 벼슬에 해당하는 3품 옥장을 수여했다. 이후 그는 법규교정소 의정관, 외부서리고문관, 농상공부 연해검사관 등에 임명되어 전신 사업 이외의 분야에서도 조선정부를 위해 일했다. 이 과정에서 뮬렌스테스는 당시 조선을 압박하던 일본이 조선의 전화사업권에 대해 부당한 압력을 가하는 것에 대항하여 시정을 요구하는 등 조선정부 입장에서 일을 처리했다고 전해진다. 뮬렌스테스는 1905년 일본에 의해 조선에 대한 통신권이 강제 탈취되어 해고될 때까지 우리나라 전신기술 정착에 기여했다.
뮬렌스테스는 당시 우리 정부에 의해 고용된 외국인 중 가장 열악한 대우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이는 그가 한성전보총국의 기술자로 일하면서 일본 측과 갈등을 빚으면서까지 조선의 입장을 대변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일본측은 그를 ‘일본에 대해서는 색안경으로 보는 귀찮은 존재’로 보았다는 기록도 있다. 비록 조선정부에 고용되었으나 모든 실권을 일본 측에 의해 행사되었던 당시 사정에 비추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상황이다. 1905년 전무학교를 그만 둘 때에도 다른 외국인 기술자들은 의원 해임되었으나 뮬렌스테스만은 파면되었다.
1905년 이후 뮬렌스테스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그러나 파면 당시 귀국여비 지급을 신청했으나 거절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미루어 파면 이후 고국으로 돌아갈 여비조차 없어서 일제에 강점된 한반도에 남아있던 10년 동안 많은 고초를 겪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그가 계속해서 조선에서 살고 있었음을 확인한 것도 1985년 한국통신연구원 관계자에 의해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지에서 그의 묘를 발견함으로써 확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