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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처음 이야기

Missionary Story

선교사 소개

Hardie, Robert Alexander (하디)
출생
1865. 캐나다
별세
1949. 미국
한국활동기간
1890 ~ 1935
국적
미국
소속교단
감리교
묘비번호
B-03(M)
선교사 동영상

선교사 이야기

“20세기 초 한국 교회 대부흥운동의 주역”



토론토대학 YMCA 후원으로 내한한 의료선교사


하디 선교사는 1900년대 초에 전개된 한반도 성령대부흥운동의 계기를 마련한 영적 지도자다. 하디 선교사는 1865년 캐나다 온타리오 주 칼레도니아(Caledonia)에서 출생했다. 고향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잠시 교사로 지내다가 의사가 되어 병든 이웃을 의술로 돕겠다는 큰 뜻을 갖고 토론토대학교(University of Toronto)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토론토대학 재학 중 학생해외선교자원운동(SVM : student Volunteer Movement for Foreign Missions)에 참여하면서 해외 선교사의 소망을 갖게 된 하디는 1890년 대학을 졸업과 함께 의사가 되었고, 켈리(Matilda Kelly)와 결혼했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아내와 함께 토론토의과대학 YMCA의 후원으로 한국에 들어왔다.


내한 초기 2년 동안 하디 선교사는 부산과 서울을 오가며 활동했다. 그리고 1892년부터는 원산으로 선교지를 이전하여 진료소와 시약소를 운영하며 선교활동을 병행했다. 하디 선교사가 원산을 선교지로 정한 이유는 자신이 독립 선교사로서 선교지역에 구애를 받지 않았고, 당시 원산에는 같은 캐나다 출신의 게일 선교사와 펜윅 선교사가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아무튼 하디 선교사는 내한 이후 약 8년 동안 소속 교단이 없는 독립선교사로서 활동하녀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하디 선교사의 회개에서 시작된 성령대부흥운동


1903년 여름, 마침 중국에서 활동하던 남감리회 여선교사 화이트가 방문한 것을 계기로, 원산에서 활동하던 남감리회와 캐나다장로회 소속 여선교사들이 1주일 동안 성경공부와 기도회를 열었다. 이들은 당시 그 지역에서 사역하던 선교사 하디에게 성경공부 인도를 부탁하였다. 하디는 이 집회를 준비하고 인도하는 가운데 자신의 영적능력 부족과 교만함을 깨달았고, 자신의 잘못을 교인들 앞에서 철저히 회개했다. 그리고 그는 '이제는 조선민족과 함께 고난을 나눌 것’을 다짐했다.


하디 선교사의 공개적 회개는 선교사들은 물론 많은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회개운동을 불러냈다. 교파를 초월하여 각 교회는 하디 선교사를 사경회 강사로 초청했고, 사경회 자리마다 하디 선교사는 무릎을 꿇고 회개하며 기도했다. 한국의 교인들도 회개운동에 동참했으며 이 운동은 1907년 평양 성령대부흥운동으로 이어졌다.


성령대부흥 이후 하디 선교사는 감리교협성신학교 교장과 피어선성경학교 교장으로 일하며 목회자 양성에 힘썼고, <신학세계>를 창간해 성령운동 연구에 전기를 마련했다. 그는 1935년 4월, 45년 동안의 한국 선교사 직에서 은퇴하여 미국으로 돌아가 미시건 주 랜싱(Lansing)에서 지내다가 1949년 별세했다.

 

양화진에는 두 딸이 묻혀 있어


양화진에는 태어난 지 하루 만에 죽은 셋째딸 마리(Marie 1893~1893)와 여섯 살에 죽은 넷째딸 마거릿(Margaret J. 1903~1909)이 안장되어 있다. 하디 선교사는 한국을 떠나는 날 양화진에 들러 두 딸과 눈물의 이별을 했다. 기독교대한감리회는 2006년 5월 24일 양화진 하디 선교사 두 딸의 묘비 위에 하디 선교사를 기리는 '영적대각성운동 기념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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