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선교사 처음 이야기

Missionary Story

선교사 소개

Miller, Frederick S.(밀러)
출생
1886. 미국
별세
1937. 한국
한국활동기간
1892 ~ 1937
국적
미국
소속교단
장로교
묘비번호
A-60

선교사 이야기

“충청 선교의 아버지”



서울 민노아학당과 연동교회에서 복음 전해


프레드릭 밀러 선교사는 충청 지역 선교 개척자로서 ‘충청도 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프레드릭 밀러 선교사는 1866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Pittsburgh)에서 태어났다. 밀러는 피츠버그대학(University of Pittsburgh)과 유니온신학교(Union Theologlcal Seminary)를 졸업한 후 아내 안나와 함께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했다. 그의 선교사역은 초기 12년 동안은 서울에서, 후기 33년 동안은 충청도에서 전개되었다.


프레드릭 밀러 선교사는 1893년 12월부터 언더우드 선교사가 세운 고아원을 맡아 운영했으며, 이를 정동예수교학당(민노아학당)으로 발전시켰다. 청년 안창호가 그의 인도로 학당에 나오기 시작하여 2년간 수학했으며 결국 예수를 영접하고 교사로도 활동했다. 또 밀러 선교사는 1895년부터 종로 연못골에서 전도활동을 시작해 연못골교회(현 연동교회)의 기초를 마련했다.

 

청주에서 안식하고 있는 충청지역 선교의 개척자


프레드릭 밀러 선교사는 1900년 초부터 충청지역 선교를 시작했으며, 1904년 10월 청주로 이주하여 북장로교 청주선교부 설립 책임자가 되었다. 이후 그는 1908년 청주선교부를 정식 출범시키는 등 이후 약 30여 년 동안 충청지역 선교사역에 헌신했다. 프레드릭 밀러 선교사가 서울을 떠나 충청도 지역에서 선교를 하게 된 배경에는 아내와 두 아들을 잃은 서울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침 그는 1904년 당시 정동여학교 교장이던 도티(Susan A. Doty) 선교사와 재혼한 직후였다.


충청지역 선교책임자가 된 프레드릭 밀러 선교사는 청주읍교회, 청천교회(괴산), 건지산교회(오창), 조치원교회 등을 개척했고, 청남학교 등 6개 학교를 설립하는 등 충청지역 선교의 초석을 놓았다. 특히 그는 금주운동과 쪽복음을 이용한 문서전도에 헌신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1911년에 프레드릭 밀러 선교사는 새로 결성된 장로교 경기충청노회 초대 노회장에 선임되었다.


또 프레드릭 밀러 선교사는 문학적 재능이 있어 많은 저서를 남겼고, 그가 지은 ‘예수님은 누구신가(96장)’ ‘주의 말씀 듣고서(204장)’ ‘맘 가난한 사람(427장)’ ‘예수 영광 버리사(451장)’ ‘공중 나는 새를 보라(588장)’ 등 5곡의 찬송가 가사가 <새 찬송가>에 수록되어 있다.


프레드릭 밀러 선교사는 한국에서 함께 사역했던 선교사와 세 번 결혼했다. 첫 아내 안나 선교사 사후 1904년 정동여학당 3대 학당장을 지내 도티(Susan A. Doty) 선교사, 1931년 정신학교에서 교육선교사로 일했던 딘(Dean, M. Lillian) 선교사와 재혼했다. 그는 1936년 정년을 맞아 은퇴한 이듬해 청주에서 별세하였으며, 1931년 별세한 도티 선교사와 함께 청주 일신여고 교정 묘역에 묻혀 있다.

 

안나 밀러 – 두 자녀와 함께 묻힌 교육 선교사


안나 밀러 선교사는 충청도 선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프레드릭 밀러 선교사의 아내이다. 안나 밀러는 1865년 미국에서 출생했다. 그녀는 1892년 남편 밀러 선교사와 함께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하여 정신여학교에서 교사로 일했다. 그러나 그녀는 1899년 출산한 첫아들은 8개월 만에, 1902년 출산한 둘째아들은 하루 만에 생명을 잃는 슬픔을 연이어 겪었다. 당시 열악했던 환경으로 인해 잇달아 두 아들을 잃은 안나 선교사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점점 쇠약해졌고, 결국 내한 11년만인 1903년 6월 사망하여 먼저 묻힌 두 아들(Fred 1898~1899/Frank 1902)과 함께 양화진에 안장됐다. 묘비에는 ‘In Jesus’라는 묘비명이 쓰여 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