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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처음 이야기

Missionary Story

선교사 소개

Martel, Emile (마르텔)
출생
1874. 프랑스
별세
1949. 한국
한국활동기간
1894 ~ 1949
묘비번호
A-15

선교사 이야기

에밀 마르텔은 약관의 나이에 한국에 와 55년 동안 살면서, 한국을 조국같이, 한국인을 동포처럼 사랑한 교육자다. 마르텔은 1874년 프랑스에서 태어나 성루이대학과 성에디아누대학을 졸업했다. 스무 살 때 마르텔은 당시 중국 상해에 있었는데, 조선정부 초청으로 1894년 7월(1895년 10월 설도 있음) 들어와 1895년 1월 관립 법어(불어)학교를 설립해 교장에 취임했다.


마르텔은 법어학교와 외국어학교에서 교수로 일하는 한편, 1900년대 초에는 중국 주재 한국 통신원과 북경 주재 대한제국 공사의 고문으로 일한 적도 있다. 마르텔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병역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고국으로 돌아갔다가 1917년 한국으로 돌아와 다시 교육자의 길을 걷었다. 일제강점기에 그는 서울프레스센터 편집국장, 체신국 외사부 등에서 일했고, 1924년부터는 경성제대에서 불어교수로 봉직했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 마르텔은 일본 경찰에 의해 자신의 <한국역사> 원고를 강제 회수 당하는 등 고초를 겪었고, 결국 1942년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되어 중국 천진으로 갔다. 강제 추방되었던 마르텔은 1947년 해방된 나라에 다시 돌아왔으나 2년만인 1949년 9월 19일 영면하여 이틀 뒤 양화진에 안장됐다.


마르텔과 한국의 인연은 이외에도 매우 깊다. 마르텔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서양음악을 소개하고 대한제국 애국가를 작곡한 독일인 프란츠 에케르트의 딸 아멜리(Amelie Eckert)와 1905년 2월, 서울에서 결혼했다. 마르텔은 3남매를 두었는데, 그 중 차녀 이마쿨라타(Immaculata martel)는 천주교 수녀가 되어 일제강점기에는 원산에서, 해방 이후에는 대구에서 수녀 선교사로 헌신했다. 또 장남 샤를 마르텔(Charles Martel)은 1949년 당시 서울 주재 프랑스 부영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샤를 마르텔은 장례미사에서 인사말을 통해‘아버지는 한국인을 자기 동포처럼 사랑했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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