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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처음 이야기

Missionary Story

연표로 보는 한국 교회사

1900
  • 장로교 남만주에 휘트모어와 안승원을 선교사로 파송
1902
  • 벙커의 옥중전도로 이상재, 이원긍, 유성준 등 정부고관 기독교로 귀의
  • 아펜젤러 성서번역위원회 참석차 목포로 가던 중 익사
  • 알렌과 존스가 주도한 조선인들의 대규모 하와이 이주 시작(감리교 선교차원)
1903
  • 황성기독교청년회 (YMCA) 발족
1904
  • 러일전쟁
  • 세브란스의 기부금으로 남대문 밖에 종합병원 설립 (에비슨)
  • 대한매일신보 창간 (베델)
1905
  • 고종 헐버트를 워싱턴에 밀파, 미국의 도움으로 일본의 침탈 막으려 시도
  • 한국복음주의선교회연합공의회 결성-장로교와 감리교의 협의체로 하나의 개신교회 설립을 목표로 함을사늑약(일제 외교권 박탈)
1906
  • 통감 이등박문의 선교사 회유책(다수의 선교사들 일제의 현실적인 힘을 인정하고 협력)
  • 성경기독교, 성경을 사랑하는 기독교인 - 선교사들이 본 당시 한국 기독교의 가장 큰 특징.
  • 성서공회에 고용된 수많은 무명의 한국인 권서들은 전국 각지를 돌면서 성경과 기독교 소책자를 보급하는 역할
1907
  • 평양대부흥운동 (장대현교회)
  • 동양선교회(성결교) 선교 시작
  • 장로교 독노회 조직
  • 상동교회에서 헐버트의 정보제공으로 헤이그 밀사사건 논의
  • 헐버트는 헤이그 현지에서 로비활동
1908
  • 구세군 선교 시작 (호가드)
1909
  • 선교구역 분할 확정(장로교와 감리교의 교단 사이에 선교의 중복을 없애고자 행정구역 단위로 선교구역을 분할하는 협정을 맺은 것)
1910
  • 한일합방
1912
  • 105인 사건 - 일제가 기독교 세력 제거 목적으로 데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건 조작해 서북지역의 기독교계 지도자 대거 검거. 선교사들 노력으로 외교 문제로 비화. 결국 날조로 밝혀짐. 교회에 자행된 일제의 엄청난 폭력.
1913
  • 장로교 총회 산동지역 선교사(박태로, 사병순, 김영훈)파송 - 선교사들 중국교회로 교적 이전.(재한외국인선교사들이 자국 파송교회의 교적을 유지한 것과 대조)
1915
  • 연희전문학교 창립 (북장로회, 캐나다장로회, 미감리회, 남감리회의 연합)
1919
  • 3ㆍ1 운동
    장로교 총회에서 선교사에게는 언권(言權)만 주기로 결정
1925
  • ‘허시모’ 사건(안식교 선교사 헤이머스가 자기 과수원의 사과를 따먹은 아이의 두 뺨에 초산은으로 ‘도적’이라 써서 추방당한 사건)
  • ‘조선기독교봉역자회의’ (한국교회대표 31인과 선교사 31인이 모여 선교사들의 인종차별의식과 우월의식에 대한 열띤 논쟁)
1926
  • 구세군 한인사관 서양인과의 차별에 항거, 구세군 사학생 28명 퇴학
1932
  • 해주 폐결핵 요양원에서 ‘크리스마스 씰’ 발행 (셔우드 홀)
1935
  • 신사참배 문제로 한국 교회에 시련
  • 일제의 반(反)선교사 정책(영ㆍ미와의 관계 악화, 식민지 경영에 가시 같은 존재들, 신사참배 문제가 빌미 제공)
1936
  • 숭실학교 맥큔, 숭의여학교 스누크 신사참배 거부로 교장 인가 취소
1937
  • ‘풀턴성명’ 강경한 신사참배 반대성명
  • 맥큔과 언더우드의 차이 (맥큔 ‘너는 내 앞에 다른 신을 경배하지 말라’ -우상숭배절대불가, 언더우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 타협적 찬성론)
  • 신사참배 반대로 다수의 기독교학교들 폐교
1938
  • 개역성서 발행 - 26년 동안 16명의 선교사들과 6명의 한국인 번역에 참여
  • 장로교 총회 불법적으로 신사참배 가결 (천주교와 타교단들 이미 가결)
1940
  • 신사참배 반대로 기독교인 대거 검거
  • 외국 선교사 대거 추방 시작
1941
  • 세계평화기도문사건 발발(미국 영국 부인 선교사 등 15명 구속)
  • 대동아전쟁 발발
1942
  • 외국인 선교사 전원 출국, 몇 사람은 포로로 억류되어 일본군과 교환
1945
  • 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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