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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진묘원

Intro to Yanghwajin

양화진이란

외국인 묘지로서 양화진의 시작

  • 초기의 외국 공사들
    대원군의 섭정을 종식시키고 고종의 친정체제를 구축한 민비와 외척들은 쇄국의 빗장을 벗기고 서구열강들과 국교를 수립하였습니다. 이러한 지각변동을 틈타 주로 영어권의 개신교 선교사들이 조선의 복음화를 목표로 제물포에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갑신정변 (1884) 당시 민영익(閔泳翊)을 구사일생으로 살려낸 서양 의사 알렌(Horace Newton Allen)덕분에 선교사들과 왕실 사이에 밀접한 관련이 맺어지고, 이는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 의 설립으로 이어졌습니다.
  • 광혜원
    금 교령(敎令)으로 인해 복음전파가 허락되지 않았으므로 선교사들은 주로 서구의 의료와 교육, 자선 사업을 통해 봉건적인 조선사회에 침투하고자 하였습니다. 당시 조선의 반기독교적인 정서의 영향으로 선교사들은 직접적인 개인전도보다는 사회 제도 전반에 걸친 간접적인 선교를 모색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것은 결과적으로 교회사가 추후 민족의 역사와 얽히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 이화학당
    한편 알렌에 이어서 광혜원(廣惠院)의 원장이 된 헤론(Heron, John W.)은 전염병에 걸린 환자들을 돌보던 중 자신도 이질에 걸려 1890년 7월 26일, 40 세로, 삶을 마감하였습니다. 당시 헤론의 시신을 어디에 매장할 지가 화급한 문제로 제기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삼복더위 중에 시신을 당시 유일하게 외국인 묘지로 사용되던 제물포까지 옮기는 것은 불가능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 허드공사 / 해론선교사
    이에 유족과 선교사들은 미국 공사 어거스틴 허드 2세(Augustine Heard II) 를 통해 한성 가까운 곳을 매장지로 해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이때 마침 조선은 통상지역 안에 외국인의 묘지를 무상으로 조성해야 한다는 수호통상조약을 영국과 체결하고 있었는데, 미국 공사 허드는 최혜국 조관를 근거로 헤론의 매장지를 한성 가까운 곳에 요구했던 것입니다. 이에 조선독판교섭통상사무 민종묵 과의 급박한 서신 왕래 끝에 양화진이 매장지로 정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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